잊지마, 천국으로 가는 마지막 길목을. 어쩌면 그곳에는…
클라우드 나인 01
유복한 집안에서 자란 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물론 어디까지나 주관적인 평가였다. 훗날 건너 들었는데, 남들 눈에는 대체로 부잣집 철부지로 보였다고 한다. 이유도 가지각색이었다. 돌잡이를 하기 전에 한국을 떠나 미국에 자리를 잡아서, CA시간에 아이스하키를 배워서, 아래로 동생이 둘이나 있지만 K-장녀스럽지 않아서, 제2외국어로 프랑스어를 구사해서, 학교 대표로 나갔던 뮤지컬에서 주연을 맡아서, 그 외 기타 등등. 얼핏 들어보면 그럴 듯 한 추측이었다. 하지만 제니퍼가 아닌 허윤진에 대해 조금만 자세히 들여다 보았다면 이민, 아이스하키, 장녀, 프랑스어, 뮤지컬과 허윤진이 물려 받을 유산과는 어떠한 연관성이 존재하지 않다는 사실을 금방 알아챌 수 있었을 것이다.
샤사, 한국에서는 이런 경우를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고 표현해. 열 번쯤 설명을 해줬지만 사샤는 말(馬)이 발 없이 어떻게 달릴 수 있겠냐며 기어코 열한 번째 역정을 냈다. 온갖 언어로 가득 뒤섞인 카페 안은 오늘도 떠들썩 했다. 그 덕분에 이러한 대화는 소란스러움의 축에 끼지도 못하고 시끌법썩한 분위기 속으로 금방 휩쓸리고 만다. 인류학 교수가 귀에 못이 박히도록 설명하던 샐러드볼 다운 광경이었다. 허윤진이 제 몫의 카페라떼를 한 입 홀짝였다. 얼음이 녹아 닝닝해진 커피에서는 이도저도 아닌 맛이 났다. 연갈색의 액체를 보며 문득 실감했던 것도 같다. 그러고 보니 얘랑 나랑 닮았네. 내 맛도, 네 맛도 없는 밍숭맹숭한 썸띵. 딱 짚어 정의 내리지 못할 정체성. 그것은 허윤진을 평생토록 뒤따라 다닐 꼬리표이자, 그 누구도 쉬이 정답을 찾아줄 수 없는 문제였다.
대학교 입학과 동시에 가족은 한국으로 돌아갔다. 다섯이서 떠나왔지만, 남겨진 건 하나였다. 스무살 허윤진. 인종차별에 이골이 난 여동생과 남동생은 부모님의 손을 잡고 인천행 비행기에 올랐다. 딱히 억울하지는 않았다. 부모님의 말마따나 이제는 미성년자도 아니었다. 옆집 데이빗이나 앞집 브리트니처럼 허윤진 역시 가족으로부터 독립할 때가 온 거다. 이는 그를 위한 첫걸음이라 여겼다. 그러고 싶었다. 출국장 너머로 사라지는 엄마아빠와 동생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건 그다지 유쾌한 일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스무살의 허윤진은 애써 울음을 참으며 겨우겨우 정신 승리했다. 첫끗발이 개끗발이다. 그러니까 무슨 수를 써서라도 버티자. 한국말에 서툴었던 허윤진은 그 말을 Sweet After Bitter 즈음으로 해석했던 것이다. 완벽한 패착이었음은 2년 뒤에야 깨달았다.
허윤진은 2학년 종강과 동시에 인생 첫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언젠가부터 생활비 통장에 찍히는 숫자가 줄어들더니, 저번 달에는 입금 내역에 아무런 글자가 나타나지 않았다. 다음 학기 등록금은 학자금 대출로 가까스로 마련했으나 기숙사비는 제가 알아서 해결해야 했다. 신문지 속 구인광고를 들여다 보며 곳곳에 전화를 돌렸다. 여기는 너무 어려서 안 되고, 저기는 경력이 없어서 탈락, 어디는 동양인 중에 불법체류자가 많아서 믿을 수 없다며 출생증명서까지 요구했다. 이렇게(가 뭔지는 모르겠으나) 생겼다 뿐이지 국적은 엄연히 미국이었다. 댁들이랑 얼굴색이 달라도 여권색은 똑같다고요 퍽킹 레이시즘들아. 입 안에서 맴도는 말을 가까스로 삼켜내고 웃었다. 어쨌거나 저쨌거나 아쉬운 건 스물 두 살의 허윤진이다. 까딱하면 길바닥에 나앉기 직전인 한국계 미국인 대학생. 그렇다고 이제와 휴학 하고 가족이 있는 한국으로 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왜 그랬냐고 묻는다면 답은 간단했다. 그동안 버텨왔던 시간이 너무 아까웠으니까. 코스트코에서 산 대용량 시리얼로 한 달 동안 끼니를 떼웠던 스무살의 허윤진이, 성적 장학금을 놓치지 않겠다고 도서관 관리인과 출퇴근을 함께 했던 스물 한살의 허윤진이, 짠하고 불쌍했으니까. 살아보겠다고 발버둥 치는 허윤진 앞에는 출처를 알 수 없는 갖은 루머가 반갑게 손을 흔들고 있었다. 아빠가 보증 잘못 서서 쟤네 집 망했잖아, 알고 보니 재벌이 아니라 다단계 회사 대표였다는데, 빚쟁이한테 쫓기다 몰래 야반도주 한 거래, 그게 아니라 쟤만 버리고……정말이지 사는 게 지긋지긋했다.
아이비리그 다니는 애들은 방학 때 잠깐 과외만 해도 1년치 학비를 벌어간다는 것도 백인 상류층에게만 해당 됐다. 어찌저찌 몇 다리 건너 면접을 보러 갈 기회를 얻어도, 재학증명서와 성적 증명서와 여권사본까지 바리바리 들고 집까지 찾아가도, 갈색 눈을 가진 금발의 미국인 허윤진은 문 앞에서 입구컷 당하기 부지기수였다. 이 역시 억울할 것은 없었다. 근방 한국인들 사이에서 허윤진에 대한 소문은 금방 퍼져나갔고, 그에 대해 별달리 해명하지 않았던 당사자 덕분에 침묵은 곧 긍정으로 받아들여졌으니까. 이쯤 되니 누군가 작정하고 제 인생을 망하려고 만드는 게 아닌가 하는 합리적인 의심이 드는 것도 오버스럽지 않았다. 허윤진은 기숙사까지 전력질주로 뛰어갔다.
그래, 이만하면 오래 버틴 거다. 방에 도착한 허윤진이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캐리어 안에 옷을 처박았다. 전화를 했던 게 언제였나 싶었다. 읽음 표시 없이 쌓여가는 문자, 1이 사라지지 않는 카톡, 착신이 정지된 번호라는 안내멘트. 즐겨찾기의 이름을 하나씩 눌러보다 결국 핸드폰을 바닥에 집어던졌다. 엄마, 아빠, 윤아, 윤호. 마치 짜기라도 한듯 전부 제 연락을 무시했다. 의도적인 회피였다. 그러다 보면 허윤진 조차 저를 둘러싼 갖가지 소문의 진상이 사뭇 궁금해졌다. 과연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진실이었을까. 아니 진실이 아닌 게 존재하기는 할까. 그랬다, 결국 사람은 사람에게 속아 넘어가는 거다. 그것이 혹여 가족이라 하더라도 말이다. 헛웃음이 절로 터져나왔다.
제 몸만한 캐리어를 끌고 기숙사를 나섰다. 수중의 돈이라고는 한국행 비행 티켓이나 끊을 수 있을까 싶은 천 달러 남짓이 전부였다. 안 되면 구걸이라도 하자 싶었다. 스물 두살 허윤진은 그만큼 절박했다. 부모님에 대한 배신감은 차치하고, 온 몸을 가득 들어 찰 정도로 외로움이 너무 컸다. 그 무기력함은 정신까지 서서히 좀먹어갔다. 여기에서 혼자 살다가는 당장이라도 어떻게 될 것만 같았다. 아빠랑 산책을 나가고 싶었다. 엄마가 해준 김치찌개가 먹고 싶었다. 윤아와 드라마를 함께 보다 깔깔거리며 웃고, 윤호와 피씨방에서 오버워치를 하다 티격태격 말싸움을 하고 싶었다. 그 평범한 일상이 허윤진에게는 너무도 간절했다. 그래서 여권과 현금만 덜렁 챙겨 비포장된 블럭을 걷고 또 걸었다.
"どこ行くの?"
사실 특별한 일은 아니었다. 아랍 왕자의 사촌동생이 여는 파티에 프랑스 룸메이트랑 같이 초대를 받고, 그곳에 참석한 체코 사람과 술을 마시는데 캠퍼스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일본어 쯤이야 대수롭겠냐고. 허윤진은 그저 앞만 보고 발걸음을 옮겼다.
"私の声が聞こえませんか"
시야가 뒤바뀐 것은 순식간이었다. 억세지만 거칠지 않은 힘에 의해 몸이 돌려 세워졌다. 허윤진은 차마 입도 다물지 못하고 두 눈만 깜빡였다.
"Nice to meet you, Jennifer."
사고회로가 싹둑 잘려나간 것만 같았다. 사리판단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확실한 건 하나였다.
"나는 카즈하에요. 일본 사람, 오사카에서 왔어요."
완벽한 초면이다.
"돈 받으러요. ちょっと待って…"
여자는 빙긋 웃으며 손가락을 들어보였다. 곱게 접힌 엄지는 무엇을 가리키는 것일까. 허윤진의 미간이 형편없이 구겨졌다. 왓더…신박하게 주의를 끌기는 했다. 듣도 보도 못한 글로벌한 구걸에 허윤진은 그저 헛웃음만 터트릴 뿐이었다.
"오랜만에 비행기 타서 피곤해요. 그러니까 빨리 끝내고 쉬어요."
"얼마가 필요하신 건데요. 4달러? 40달러? 저도 그 이상은,"
"달러? 잠깐만…그러면 다시 계산해야 돼요."
"알겠어요 이거 드릴 테니까 환전은 은행에서 알아서 하시면,"
"4억엔. 이자 빼고."
백팩을 뒤적이던 허윤진을 멈칫하게 만드는 숫자였다.
"달러 얼마에요? 한국 돈으로는 삼십팔억이라고 하는데."
"……"
"그 안에 있어요? 그러면 나한테 줘요."
"……"
"쉽게 정리해서 다행이다, 그쵸?"
확실한 게 하나 더 늘었다. 저 여자는 미친 거다. 그렇지 않고서는 아무렇지 않게 저런 말을 할리 없다. 삼십팔억이 누구네 집 개 이름도 아니고.
"뭐해요? 나 그거 받으러 왔다니까?"
허윤진은 여자를 위아래로 훑어보다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고는 백팩에서 십달러 두어 장을 꺼내 여자에게로 건넸다. 여자는 말없이 지폐와 허윤진을 번갈아 쳐다봤다. 마음 바뀌기 전에 가지고 가요. 허윤진이 그렇게 말하자 여자가 잠시 망설이다 손을 뻗었다.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
"에이…장난하지 말고요. 나 조금 짜증나려고 해."
가차없이 찢어진 지폐는 한낱 종이쪼가리에 지나지 않는다. 허윤진은 느릿하게 마른침을 삼켰다.
"허성호."
어수룩한 발음으로 익숙한 이름을 말한다.
"김세라."
확실한 게…과연 무엇일까.
"허윤호, 허윤아."
여자는 코트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툭 던졌다.
"제니퍼 허, 아니 허윤진."
차마 그것들을 주워들 생각도 못했다. 제 손에 들려 있는 것과 한 치도 다름이 없는, 그 손바닥 만한 종이뭉치가 의미하는 게 무엇일지도 전혀 알고 싶지 않았다.
"나 달리기 잘해요."
"……"
"도망가지 말라구요. 그러면 다쳐 그 사람들."
"……"
"이제 이해했어요? 그러면 줘요, 돈. 4억엔만 있으면 전부 끝."
나뭇잎 사이를 파고드는 햇빛이 꽤나 눈부셨던 어느 11월이었다.
어설픈 한국말로 설명한 바는 이러하다. 연이자 440%의 사채를 썼단다. 미국에서 지낼 때 주변 아시아계 이웃들과 심심풀이로 했던 내기 마작에 중독이 됐다나 뭐라나. 회사 출장 핑계로 며칠씩 집을 비웠던 것도 실은 원정 도박 하러 차이나 타운으로 떠났던 거라고 한다. 한국인이 중국 도박 하다가 빚을 졌는데 왜 일본인이 수금을 하러 왔냐 물었더니 되돌아온 대답은 더더욱 가관이었다. 한국 깡패가 운영하는 하우스(도박장) 중에 야쿠자랑 엮이지 않은 곳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한 줄로 요약하자면 도박에 눈이 멀어 야금야금 사채를 빌리다 하우스(도박장)에서 끌어올 수 있는 한도를 넘어섰고, 결국은 신체를 담보로 야쿠자한테까지…허윤진은 혀를 질끈 깨물었다.
아프다. 그것도 더럽게 아팠다. 결국 피까지 났다. 앓는 소리가 입술 사이로 절로 새어나갔다. 비릿한 맛이 입 안을 맴돌았다. 영수증으로 종이비행기를 접던 여자는 그제야 맞은편으로 시선을 돌린다.
"何してるんですか."
끝이 살짝 올라간 여자의 목소리로 그것이 의문문임을 눈치챘다. 하지만 추측도 거기까지다. 그에 대해 대꾸할 말을 찾지 못했다. 아니, 애초에 어떤 걸 묻는지도 알 수 없다. 허윤진이 눈만 도로록 굴리다 조심스레 고개를 저었다.
"Don't be nervous."
"Can you speak English?!"
저도 모르게 큰소리를 낸 뒤에야 입을 틀어 막았다. 내내 말려 올라가 있던 여자의 입꼬리가 그 순간에는 일자로 판판하게 굳어졌다. 그제서야 긴장이 됐다. 손끝은 잘게 떨리고, 입은 바싹 말라왔다. 죄를 진 것도 아닌데 그랬다. 이상하게 고개가 자꾸만 아래로 숙여졌다. 가족들의 여권, 그리고 새빨간 지장 찍힌 계약서를 본 이후 허윤진은 내내 그 상태였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할 수 있는 말은 없었다.
좀처럼 실감 나지 않았다. 입술을 다시금 씹어봤다. 있는 힘껏 물어버렸더니 나중에는 눈물까지 핑 돌았다. 정말 꿈이 아니구나. 허윤진은 한숨을 삼키고 숨을 골랐다. 시야가 뿌옇게 흐려지는 것까지는 막을 수 없었다. 이제는 그럴 힘도, 정신도 남아있지 않았다. 가디건 소매로 연신 눈가를 훔쳤다. 한 번, 종이 위로 물방울이 떨어졌다. 두 번, 콧등이 시큰거렸다. 세 번, 눈시울이 따끔거려야…했다. 그러나 소매를 움켜쥔 허윤진의 손 보다는, 허윤진의 눈꼬리에 매달린 눈물을 닦아주는 행동이 더 빨랐다.
“아까 인사 영어로 했는데, 기억 안 나는구나.”
도무지 속을 알 수 없는 여자였다. 이목구비의 선은 은은했지만, 얼굴에서 느껴지는 전반적인 분위기는 전혀 무르지 않았다. 쉽게 깨트리지 못할 단단한 두부 같아. 허윤진은 여자의 첫인상을 그렇게 정리했다. 한편으로는 문득 궁금해졌다. 원래 야쿠자라는 사람들은 빚쟁이한테 카모마일 릴렉서 사주며 어르고 달래서 떼인 돈을 받아가는 건가. 의자 옆에 놓인 백팩을 한 번, 그리고 맞은 편에 앉은 이를 한 번 쳐다봤다. 지치지도 않고 미소를 짓는 그 여자를.
"그런데요, 왜 울었어?"
"…네?"
"내가 제니퍼를 슬프게 했나요?"
먹으라고 사준 건 아닌가 보다. 머그잔에 입을 대자마자 불시에 건너편에서 날아온 질문이 목구멍을 틀어막았다. 한 입 머금었다가 밖으로 뿜어내지 않은 게 어디야. 허윤진이 또 다시 정신승리하며 테이블로 잔을 내려뒀다.
"저는,"
"제니퍼는."
"아니 그러니까 제가 울었던 건,"
"제니퍼가 울었던 건요."
"…그러게요."
가만 고민을 해봐도 마땅한 대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내가 왜 울었더라. 분해서? 억울해서? 화가 나서? 무서워서? 짜증나서? 다른 건 몰라도 슬퍼서 운 건 아니라고 자신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끝내 그 생각을 입 밖에 꺼내두지는 않았다. 마지막으로 남은 알량한 자존심일 수도 있다. 하지만 잠시 되뇌여 보면…이건 자존심이 아니라. 퍼뜩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좌우로 빠르게 휘적였다. 티 없이 맑은 눈에 홀려 전 재산을 홀라당 내어줄 뻔 했다. 허윤진은 손등 위로 새파란 핏줄이 톡 튀어나올 정도로 세게 백팩 끈을 붙잡았다. 그 다음에는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렸다.
"저는 이제 죽는 건가요?"
물론 시도는 좋았지만 결과가 다소 처참했다. 여자의 미간이 사정없이 찌푸려졌다. 허윤진이 허둥거리며 말을 이어갔다. 아니 그러니까, 영화에서 보면 갱이나 마피아 같은 아저씨들이 빚쟁이한테 찾아와서 총으로 이렇게 쏴버리잖아요. 설마 레옹 안 봤어요? 대부는요? 야쿠자는 어떻게 하는데요? 칼로 막 베어버리거나…
"왜요?"
"돈을…못 갚았으니까?"
"누가요?"
"여기에…적힌 사람들이?"
"그래서 전부 없어지면 내 돈은 어디로 가?"
"…네?"
"아, 잠깐만. 파파고 필요해요."
퍽킹 이디엇 제니퍼. 허윤진은 손바닥으로 이마를 감싸며 혼잣말을 읊조렸다. 아무래도 심기를 제대로 거슬러 버린 모양이었다. 여자는 있는 대로 인상을 쓰고서는 말없이 핸드폰만 만지작거리는 것이다. 피가 마른다는 게 이런 기분이구나. 허윤진이 의자에 있던 백팩을 덜렁 들어 테이블 위로 올려뒀다.
"천 달러 조금 넘는데 일단 이거라도,"
"허락 안해."
이러나 저러나 이건 진짜 분명했다. 쟤든, 나든, 아니면 둘 다든 제정신은 아니야. 왜 갑자기 그렇게 환하게 웃으면서 핸드폰을 보여주는 건데. 여자는 별안간 백팩을 밀어내고 테이블 앞으로 바짝 다가왔다.
"私が許すまであなたは死にません."
번역기의 오류였을 거다.
"だから Don't worry, 허윤진."
그러니 허윤진은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연이자 440%의 원금 4억엔만큼의 용서에는 과연 얼마만큼의 시간이 필요했을까.
당장은 아니었다. 그러니 백팩을 제 것처럼 챙겨 유유자적 카페를 나서는 것이다. 한국행 편도 비행기값이 들어 있는 백팩, 그러니까 허윤진의 전 재산은 그렇게 여자의 어깨 위로 짊어졌다. 솜털처럼 아주 가뿐히 말이다. 나름 며칠 동안 땀 흘려 번 돈이었는데 저렇게 보니 감회가 남달랐다. 이름 모를 감정이 명치에서부터 울컥하고 치밀어 올라왔다. 뒤따라 걷던 허윤진은 코를 훌쩍이다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기요. 못 알아 들었나 보다. 헤이. 못 들었을 수도 있다. 고심하듯 눈썹을 긁적이다 목소리를 높였다. 오사카씨. 절대 이름을 까먹어서 그런 건 아니었다.
"어디가는 거에요?"
"호텔."
"저는…어떡해요?"
"그걸 왜 나한테 물어봐요? 나는 여행객, 허윤진은 여기 살잖아요."
"그게 아니라요…"
"また何が問題なんだよ."
"…네?"
"문제 있어요?"
있기만 하면 다행이지. 허윤진은 자존심은 저 멀리로 내던지고 오른손 검지로 앞을 가리켰다. 자세히는 여자가 어깨에 멘 백팩을, 그 안에 든 달러뭉치를.
"그거 없으면 길바닥에서 자야 된다구요."
"이건 내 돈이잖아요."
"그건 아는데요…"
말끝이 흐려졌다. 전부 사실이었으니까. 저 여자는 일본인으로 추정되는 여행객이고, 허윤진은 뉴욕에 사는 미국 시민권자다. 그런데 가족과 함께 살았던 집은 1년 전에 경매로 넘어갔고, 대학교 기숙사비는 아직 납부하지 못한. 그리고 그 허윤진이 버거킹에서 파트 타임 뛰며 벌었던 천삼백 달러는 고스란히 채권자에게 돌아가야 마땅한 것이다. 비록 한일(깡패) 합동 대출 회사가 만들어낸 고고고금리 불법 사채라고 해도 엄연히 계약은 계약이었으니. 억울해도 어쩌겠는가. 연대 보증인란에 찍힌 이름 석자는 제 것이 분명했다. 허성호, 김세라, 그리고 허윤진.
"뉴욕은 밤에 되게 추워요."
"제 코트는 따뜻해요."
"그리고 뒷골목에는 갱도 많아요."
"마켓에서 총 샀어요, 돈 워리."
"아 총을 샀…뭐라고요?! 외국인한테는 그렇게 막 안 파는데?!! 그거 불…법……"
자신을 야쿠자라고 소개하는 일본인에게 준법을 논하는 것만큼 부질 없는 일이 또 있을까 싶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허윤진이 두어 번 헛기침하며 목을 가다듬었다. 여자는 그런 허윤진을 빤히 바라보다 어깨만 으쓱였다.
"아무튼요 오사카씨. 중요한 건 이게 아니라,"
"카즈하."
"카즈하니까 제 말 좀…네?"
"오사카는 고향이고, 내 이름은 카즈하에요."
다소 정곡을 찔렸으나, 허윤진은 마치 알고 있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보는 것처럼 이 후드티 되게 얇아요, 그리고 저는 총 같은 거 가지고 있지 않아요. 물론 가지고 싶지도 않고요."
"…그래서요."
"아까 카즈하씨가 그랬잖아요. 내가 용서, 아니 허락할 때까지는 너는 죽을 수 없다."
"그게 왜요."
"재워만 주세요."
"何ですって?"
첫 번째, 왼손으로 가슴팍을 가리킨다. 두 번째, 양 손을 교차킨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손가락 끝을 붙여 삼각형을 만든다. 한 음절씩 끊어 읽는 건 덤이었다.
"나, 없어, 집."
"……"
"여기, 위험해, 엄청."
"……"
"총으로, 쏜다, 마음에 안 들면."
엄지와 검지를 빼고 나머지 세 손가락을 접었다. 그리고는 카즈하를 겨눠 쏘는 시늉을 했다.
"…윽."
허윤진은 진심으로 고민했다.
야쿠자 자격증이라도 받아야 되는 거 아닐까.
"ところで、あなたは誰でもこう信じますか."
"데려가 준다고요?"
"위험한 건 총이 아니라……"
가을이라서 그랬다. 별 것 아닌 일도 깊은 상념에 빠지게 만드는 아리송한 계절에는 이따금씩 누군가의 따끔한 충고나 조언도 흘려 듣고 만다. 바로, 지금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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